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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갑하 시인 - 시조문학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한국문단의 새로운 리더

  • 관리자
  • 2020-04-29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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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문학 2020년 상반기호(104호) 메인스토리

시조문학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한국문단의 새로운 리더 – 권갑하 시인

 

새로운 2020년 새해를 맞으며 세상은 한껏 꿈에 부푼다. 지난해 초 <스토리문학>에 시인으로 등단한 경북 문경 출신의 천영필 시인은 고향의 선배이신 권갑하 시인과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다. 이에 나는 문경 출신 송옥임 시인이 떠올라 함께 만나자고 했고, 그리하여 드디어 문경 출신 권갑하, 송옥임, 천영필 시인과 우리 스토리문학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며칠 째 겨울비가 내리는 1월 7일 화요일 권갑하 시인이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고양 원당 농협대학교 내에 있는 농협중앙회 도농협동연수원을 찾아갔다. 나는 전하라 편집장과 함께 고양시 신원동에 살고 있는 송옥임 시인을 픽업하여 도농협동연수원으로 가기로 하였고, 천영필 시인은 함께 공부하고 있는 심재원 님과 원흥역에서 직접 도농협동연수원으로 오기로 했다. 권갑하 시인이 원장으로 근무하는 농협중앙회 도농협동연수원은 “도시와 농촌의 아름다운 협동, 행복한 동행”이란 슬로건 아래 도농협동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는 국민 연수기관으로 도시와 농촌, 도시민과 농민들이 상호 이해와 신뢰 속에서 서로 힘을 합쳐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잘 사는 도농협동(都農協同)의 복지국가로 우뚝 세우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시조문학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문단의 새로운 젊은 리더, 권갑하 시인은 1958년 문경에서 출생하여 농협중앙회와 농민신문사에서 근무하였으며,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한양대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5년 ‘나래시조’ 동인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해 1991년 《시조문학》 2회 천료, 1992년 1월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시집에 오른 사랑 테마의 첫 시조집 『단 하루의 사랑을 위해 천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을 비롯해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 인간성 상실을 다룬 『세한의 저녁』과 『외등의 시간』, 다문화 이주여성의 삶을 테마로 한 『아름다운 공존』, 발해 유적지를 겨울 혹한기에 답사하고 쓴 『겨울 발해』 등을 출간했다. 시조문학상으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제30회(2011년) 중앙시조대상을 일찌감치 수상했으며, 나래시조시인협회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등을 거쳐 2015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에 선출되었고, 2019년에는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당선되었다. 시인은 직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왕성한 개인적 창작 활동을 중심으로 여름시인학교 개최와 시노래 기획 공연 등 시조문학 대중화 운동에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권갑하 시인은 1958년 경북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탑동이라는 백두대간 남쪽자락 깊은 산골에서 아버지 권석문(權錫汶, 본관 禮泉) 선생과 어머니 반우중(潘又仲, 본관 巨濟) 여사와의 사이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나 경북 북부지방의 강한 유교문화권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권갑하 시인의 생가가 위치한 곳은 조선시대 때 예천군에 속했는데, 구한말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과정에 고향땅이 위치한 예천군 용문면의 일부가 문경군에 편입되면서 행정상으로는 문경권, 생활 문화적으로는 예천에 속하면서 안동문화권의 영향을 받았다. 권 시인의 집은 면과 면의 경계에 위치하여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15리의 먼 길을 걸어서 다녀야 했다. 당시 재학생 중에서 집이 제일 멀었는데, 그런 사정으로 시인은 6학년 때부터 부모 곁을 떠나 누나와 함께 외지생활을 시작한다.

권갑하 시인은, 조선 중기 문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보물 제878호)과 『초간일기』(보물 제879호) 등을 남긴 초간 권문해 선생(종택별당 보물 제457호)의 12대 손으로 학문과 문장, 절의와 전통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한 집안에 인문적 가치가 높은 보물이 이처럼 많은 집안은 안동 문화권 내에서도 드물다고 한다.

권갑하 시인의 본관은 예천(禮泉)이다. 권씨라면 다들 안동권씨 단본으로 알고 있어 성씨 얘기가 나오면 권 시인은 머리가 복잡해진다고 한다. 설명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웃으며 그냥 안동권씨가 되기도 한단다. 권 시인의 부인 권차숙 여사가 안동권씨라 잠시 처갓집 족보로 살기도 한다며 웃는다. 이런 사연이 화제가 되어 안동권씨 대종보 회보에 소개되기도 했다니 권 시인의 이야기에 수긍이 간다.

예천권씨는 원래 ‘흔(昕)’씨였는데, 고려 19대 명종의 초명과 29대 충목왕의 이름자(諱)가 ‘흔(昕)’이어서 기휘(忌諱) 관례와 왕명에 따라 당시 종손의 어머니(안동권씨) 성인 ‘權’을 빌리고 세거지 예천을 본관으로 하는 ‘예천 권’씨로 개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천권씨 문중에서는 권 시인처럼 안동권씨 집안과 혼인하는 것을 좋게 생각한다고 한다.

예천권씨는 조정에 ‘오복문(五福門)’이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으나 조선 전기 4대 사화 중 첫 사화인 무오사화 때 수헌(睡軒) 권오복 선생이 연산군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해 지금도 인구가 매우 적다고 한다. 그러나 절의의 선비 수헌 권오복, 임란 때 의병장을 지낸 영사당 권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난 초간 권문해 등 대쪽 같은 선비정신이 면면히 내려오는 가문의 전통을 갖고 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안동편에서 “안동양반의 요건으로 ①사화에서 화를 입은 가문일 것, ②임란 때 의병장이 나온 가문일 것, ③과거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일 것” 등을 꼽았는데, 예천권씨의 경우 족친 수는 많지 않지만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청류의 선비 양반 가문이라 할 수 있다.

권갑하 시인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급반장을 하고 6학년 때 전교어린이회장을 하는 등 지금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당선된 이력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 산골 출신이지만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문교부장관상을 받았고, 군복무는 물론 대학 생활에서도 간부 활동을 이어갔다. 초등학교 때는 글짓기와 그림, 서예부문에 소질을 발휘해 각종 대회에서 입상했는데, 중학교 때 담임이셨던 김정숙 영어 선생님이 소질을 보고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하였으나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반대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지금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데, 특히 서예에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 문단 안팎에 소위 ‘권갑하체’가 나름 인기를 얻고 있다.

권갑하 시인은 가정 형편상 사립대학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고, 전 학년 학비 면제, 전원 기숙사 생활, 졸업 후 전원 취업이 보장되는 당시 농협초급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평소 영어 등 어학을 좋아했던 그는 카투사(KATUSA)로 미군부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면서 세계와 삶을 보는 인식과 안목을 키우는 한편,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방송대 영문과에 편입한다. 그 이후에도 그는 공부를 계속해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한양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문화콘텐츠학을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면서 문학과 문화를 보는 관점과 시각이 새로워졌고 남다른 영상시대의 감각을 익히게 된다. 이 후 권 시인은 문자 중심의 문학 활동에 변화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글을 써오고 있으며 문학과 음악, 그림, 서예, IT 등 주변 장르와의 융합 활동을 앞장서 실천하고 있다. 시집을 발간할 때 특히 이미지와 융합하는 콜라브레이션을 실험하고 있는데, 실제 2011년 시집 『아름다운 공존』 부터 이를 선보이고 있다. 특히 권 시인은 과거 SBS ‘도전 1000곡’ 프로그램처럼 시조 100편을 암송해 무대에 올라 두 팀씩 토너먼트로 암송 경연을 펼치는 문화콘텐츠 ‘시조암송경연대회’를 기획해 1등에게 300만원의 상금을 주는 대회를 지금까지 8회째 개최하고 있는 데, 이 또한 영상시대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문학 활동이라고 강조한다.

그럼 여기서 권갑하 시인과의 취재 내용을 대화체로 실으며 호칭은 생략한다.

김순진 : 안녕하세요. 부이사장님, 저희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별히 우리 스토리문학과 관련이 있는 시인들을 초청하여 오찬을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먼저 고향 이야기 좀 해주세요.

권갑하 : 네, 반갑습니다. 우선, 전통 있고 좋은 작품을 많이 수록하는 <스토리문학>의 메인스토리에 저를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동안 이상범, 이근배, 최승범, 지성찬 등 이름 있는 시조시인을 취재한 것을 보아왔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초대해주시니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저는 경상북도 문경의 산골 촌놈입니다. 소백산의 따뜻한 남쪽 자락에서 태어났지요. 산태극수태극의 명당 기운이 서려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인데, 지금도 유년의 강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그리움의 뭉게구름이 하늘 가득 피어오릅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산은 저에게 중요한 화두처럼 높고 깊게 자리 잡았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 저를 앞에서 끌어주었고, 어머니 품속 같은 넉넉함으로 껴안아주고, 응원해 주었죠. 그래서 저는 탁 트인 벌판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갇힌 공간을 좋아합니다. 첩첩으로 갇혀지는 것이 생의 소원이라고까지 했지요. (웃음) 무언가에 갇혀질 때 저는 참 자유, 참 기쁨을 만끽합니다. 어머니 자궁 같은 깊숙한 산에 갇힐 때 지친 영혼은 마치 봄날의 뜨락처럼 생기를 얻고 놀랍게도 드넓은 세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있어 갇혀짐은 풀려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하라 : 그러고 보니 산골출신이라는 것이 오히려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군요. 문경은 어떤 고장이고 하늘재는 어떤 지명인가요?

권갑하 : 문경은 경상도 최북단의 울타리이자 기호지방으로 가는 관문이죠. 험준한 산들이 영남과 기호를 갈라놓았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숲을 헤치고 바위를 허물어 길을 개척했습니다. 지리적으로 경계지여서인지 문경사람들은 도전의식이 강하고 의외로 사고도 유연합니다. 문경 출신인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영향이 컸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문경(聞慶)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고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 미끄러진다”는 말도 그와 관련된 속설이죠. 재미있는 문경새재 이야기는 ‘태조왕건’ 드라마 소식을 듣고 제가 1998년 펴낸 『왕건과 떠나는 문경새재 답사여행』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나중에 자세히 들려 드릴게요.

사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초에 개척된 길이죠. 그 이전의 소위 영남대로는 하늘재를 넘는 길이었어요.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최단거리 고갯길인데, 우리 천영필 시인님 고향마을이 있는 곳이죠. 저의 서재인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고요. 저의 원래 고향은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더 가야 하는데, 문경의 북서쪽에 위치한 하늘재가 너무 마음에 들어 20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았죠. 하늘재는 죽령보다 2년 앞선 서기 156년에 백두대간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유서 깊은 고갯길입니다. 후삼국 쟁패기 때 왕건과 견훤이 수없이 부딪혔던 국경지대였고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하면서 남쪽 신라 땅을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기도 하죠. 말하자면 하늘재 고개 남쪽이 영남(嶺南) 땅입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할 때도 이 고개를 넘었었죠.

송옥임 : 그렇군요. 우리 문경에 그런 역사가 있었네요. 오늘 많이 배웁니다. 선생님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 좀 해주세요.

권갑하 : 제가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보기 드문 대가족이었어요. 지금 가보면 그 많은 식구가 어떻게 이 좁은 집에서 살았을까 싶을 정도인데요, 그러나 방이 비좁았다든가 하는 그 어떤 생활의 불편함 같은 것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이고 작은 아버지, 고모 방에서 공부도 하고 잠도 잤어요. 분가를 한 사촌 가족들도 방학이 되면 큰집인 우리 집으로 다들 몰려왔죠. 아무래도 방이 비좁아 아주 추운 겨울이 아니면 마루나 마당에 멍석을 깔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를 때면 누이동생과 나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먼지를 쓸어내는 일에서부터 수저를 놓고 부엌에서 밥과 반찬을 날라 상을 차리는 일들을 서로 하려고 다투곤 했지요. 저녁이 되어 할아버지께서 건너 마을 아무개네 집 이야기로 말문을 여시면 쇠죽을 먹던 소도 귀를 쫑긋 세우고 횃대에 오른 닭들도 홰를 치고 귀를 세워 엿듣곤 했지요. 언제부턴가는 아버지께서 사 오신 라디오에서 나오는 ‘고춘자, 장소팔’의 배꼽 잡는 만담 이야기로 온 집안이 떠들썩하곤 했지요.

천영필 : 참 화목하게 자라셨네요. 특별한 스승이나 인연이 있는 문인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권갑하 : 누구나 그렇지만, 학창시절에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어요. 공부는 기본이고 글짓기와 서예, 그림 등 예능분야에 소질이 있었는지 각종 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죠. 초등학교 때 마라톤선수로, 중학교 때는 배구선수로도 활동했으니까요. 매직글씨를 잘 써서 논산훈련소에서는 차트병으로 뽑혀 훈련 대신 차트만 쓰다 졸업했죠. 초등학교 때 글짓기 지도를 하셨던 김정일 선생님과 서예 지도를 해주셨던 유명준 선생님이 계셨는데,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능분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군복무를 마치고 직장에 복직해서는 시와 수필, 칼럼 등 닥치는 대로 써서 여성중앙 등 각종 잡지에 투고를 하곤 했는데, 이 무렵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와 지방에서 문단 활동을 하고 계시던 정석주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이것저것 쓰지 말고 우리 민족시인 시조에 일생을 걸어보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시조를 쓰기로 결심을 했지요.

김순진 : 그랬군요. 그럼 본격적으로 시조를 쓴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권갑하 : 1984년부터 시조를 쓰기 시작해 각종 잡지에 실리고 이듬해는 백일장에 입상도 했기 때문에 생각이 있었다면 등단도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당시 저에게 문학은 취미 그 이상은 아니었고 그보다는 ‘농업, 농촌, 농협운동’이 더 중요한 일이어서 등단 자체는 생각도 않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1990년 서울로 근무지가 이동되어 어느 문학 모임에 나갔다가 충격을 받았어요. 나보다 늦게 시조를 쓴 분이 신춘문예 출신이라며 으스대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집에 오자마자 《시조문학》에 등단 작품을 보냈어요. 리태극 선생께서는 제가 등단을 한 줄 알았다며 연이어 2회 추천 완료를 해주셨어요. 급한 마음에 신춘문예에도 여기저기 작품을 보냈는데, 1991년 말 일본 출장 중에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하라 : 시조를 쓰는 배경이나, 이유, 좋은 점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권갑하 : 제가 시조를 쓰게 된 것은 정석주 선생을 만나면서였습니다. 당시 정석주 선생께서는 전국을 누비며 시조 보급에 애를 쓰신 대단한 시조문학 운동가였어요. 그 선생님의 시조사랑 정신과 시조에 일생을 걸라는 권유에 큰 감명을 받아 그 때부터 시조 한 길을 걸어오게 되었지요. 그래서인지 제가 1985년 결혼할 때 주저함 없이 정석주 선생님을 주례로 모셨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시조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시조 창작법을 특별히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어요. 말 그대로 독학이었어요. 나래 동인이 된 이후에는 근무처 이동이 잦고 직장 생활도 승진 등으로 무척 바빴지만 저의 한 호도 거르지 않고 계간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했어요. 그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1980~90년대 총회나 여름 세미나 때면 당시 나래시조 고문이셨던 박재삼, 백수 정완영 선생님을 뵙고 그 분들의 높은 문학적 경지와 말씀을 듣는 것도 큰 공부가 되었어요.

20대 초반부터 시조 형식으로 시를 쓰는 것이 몸에 배어서인지 시조 형식은 창작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아요. 시조 덕분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의 뼈대를 이해하게 되었고 자유시나 산문, 신문기사 등 어떤 종류의 글도 압축과 절제, 정교한 글쓰기가 된 것 같아 시조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농민신문사에서 30년 가까이 기자, 편집장, 국장, 논설실장 등으로 근무했는데, 직장의 업무활동에도 시조 창작 활동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송옥임 : 한 고장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문학토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나래시조> 동인으로 오래 활동하고 계신데, <나래시조>에 대하여 말씀해주세요.

권갑하 : 나래시조는 1966년 나래문학회로 출발했고 1980년 계간 동인지 <나래시조>를 창간해 오늘에 이르고 있죠. 1980년대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많지 않던 시절, 회원이 한 때 1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시조 동인지로 인기를 끌었어요. 시조 보급운동 차원에서 정석주 회장이 열정적인 리더십으로 이끌었는데, 간암으로 너무 일찍 타계를 하시는 바람에 회원들에게도 타격이 컸죠.

군복무 후 고향 농협에서 근무할 때인 1983년 정석주 선생을 처음 만났고 1985년 나래시조 동인으로 정식 가입했어요. 정석주 회장 타계 후에도 나래시조는 대구경북지역에서 계속 발간되었는데, 제 근무처가 서울로 이동되고 편집장을 맡으면서 편집 업무를 가져오게 됐어요. 나래시조 1세대 막내였기 때문에 편집 업무를 맡을 회원이 마땅히 없었어요. 부득이 제가 회장과 편집 업무를 모두 떠안은 거죠. 2000년대 들면서 개인적으로 시조대중화 운동을 전개하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래시조의 업무를 떠맡게 되면서 나래시조를 통해 운동의 불씨를 당긴 거죠. 《나래시조》는 혁신호를 내면서 열린 문학지를 표방했고, 김천 직지사에서 일반인 대상 여름시인학교 개최에 이어 인터넷문학클럽 <시로여는 e좋은세상>을 운영했습니다. 당시 정말 잘 한 일 중 하나는 젊은 시인들을 나래시조 2세대 그룹으로 대거 영입한 점입니다. 그분들이 지금 나래시조의 중심이 되고 있거든요. 이렇게 하여 계간 《나래시조》와 여름시인학교, 인터넷문학클럽이 상호 시너지를 발휘하는 문학 운동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그 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시인학교는 2008년 개최 장소를 문경새재로 옮겨 올해로 18년째 맞고 있습니다.

시조 문단에서 나래시조의 특징을 든다면 우선 시조 단체 중에서 젊은 시인들이 가장 많이 소속된 단체라는 점, 그리고 좋은 작품 써 각종 문학상을 가장 많이 받고 또 활동을 역동적으로 펼치는 단체라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는 시조 문단에 ‘소금 역할’을 하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문학상을 심사할 때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심사위원을 평균 5명 정도로 늘려 다수결 방식을 채택하고, 신인상 당선자에게 일체 잡지 강매를 하지 않는 신인 등단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천영필 : 저도 참석 한 적이 있지만, 매년 문경새재 여름시인학교와 전국시조암송대회 등을 열고 계신 걸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권갑하 : 여름시인학교를 2003년에 직지사에서 처음 시작했던 것은 당시 주지스님이 문경 김용사 주지로 계셨던 분이라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또 백수 정완영 선생의 문학적 고향이어서 직지사를 장소로 택했습니다. 2005년 백수정완영전국시조백일장 개최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지금은 한반도의 중심인 문경새재로 장소를 옮겨 매년 150여명의 문학 지망생과 문인들이 참가비를 내고 동참하는 명실공이 자발적인 시조문학 축제로 자리매김해가고 있습니다. 여름시인학교는 ‘창작강좌 문학특강’을 중심으로 ‘시조100편 암송 전국시조암송경연대회’, ‘전국시조백일장’, 시조 1편을 예술적으로 낭송하는 ‘전국시조낭송대회’, 시조를 현대가요로 작곡해 발표하는 ‘시노래 공연’ 등으로 구성되며 나래시조문학상, 올해의단시조대상, 젊은시인상, 정석주시조문학상 등의 문학상도 함께 시상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매년 8월초 문경새재유스호스텔 일원에서 1박2일로 열리며 보여주기식이 아닌 늘 알찬 내용의 행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시인학교 교장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데, 제가 나서지 않으면 광고 조달 등 해결되지 않는 일이 많아 애로도 적지 않습니다. 여름시인학교 관련 자료와 책자, 사진 등은 지난 해 개관한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관장 권갑하) <나래시조관>과 <문경새재여름시인학교관>에 비치, 관리하고 있습니다.

시조를 100편 암송해 두 팀이 무대에 올라 서로 한 편씩을 뽑아 암송하게 하는 <전국시조암송경연대회>는 올해로 8회째는 맞습니다. 1등 상금을 500만원까지 올렸다가 지금은 300만원을 수여하고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와 큰 감동을 받는 문학콘텐츠입니다. 경연 방식은 암송대회용 시조집 <도전! 시조암송100편>에 실린 100편의 시조를 암송해 토너먼트로 3판2승제, 결승은 5판3승제로 승부를 가리는 방식입니다. 중앙일보와 여성소비자신문, 공익채널인 육아방송에서 도보, 방송을 후원하고 있으며 문경시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죠.

김순진 : 고향에 집필실을 마련하셨다면서요. 송옥임 시인이 첫 시집을 낼 때 저는 서지당(鉏志堂)이란 호를 지어주었는데, 호미로 뜻을 일군다는 뜻이지요. 송 시인은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집필실의 당호가 ‘산다시월헌(山茶十月軒)’이라고 들었어요. 누가 지어주신 당호인가요

권갑하 : 서지당(鉏志堂)이라, 참 의미 있는 당호네요. 김순진 발행인께서 참으로 좋은 당호를 지어주셨군요. 저의 서재 당호 ‘산다시월헌(山茶十月軒)’은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저와 ‘역류’ 동인인 이종문 시인께서 지어주셨어요. 이종문 시인과는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인연이 깊습니다. 김상옥·이상범 선생님의 심사로 제가 먼저 당선되고, 이듬해인 1993년에 이종문 시인이 당선되었지요. 제가 이종문 시인을 ‘종문이 형’이라 부르는 것은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측면도 있지만 ‘문학동인’으로서의 신뢰와 정, 그리고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2002년 하늘재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이종문 시인께 당호를 부탁했는데, 얼마 뒤 ‘산다시월헌(山茶十月軒)’이란 당호와 함께 ‘청석정(聽石亭)’이란 정자 이름까지 지어 보내왔어요. 몇 해 전 ‘간서우수와(看書又睡窩)’란 별채 당호도 청해 받았어요. “마음에 드시면 사용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려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훗날 제가 사용해도 되니까요.”라는 편지글과 함께 보내왔는데,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기도 했다.”는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에서 따온 당호지요. 너무나 마음에 들어 지금도 그 당호는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간서우수와’ 당호는 몇 해 전 갑작스레 타계하신 서예가 심경 황규옥 선생께서 쓰셨고, ‘산다시월’ 당호는 경기대학교 이사장으로 서예가이신 일도 박영진 선생께서 써주셨습니다.

전하라 : 두 개의 당호와 정자 이름을 이종문 선생님께 받으셨네요. 그럼 아호(雅號)를 지어주신 분도 있나요?

권갑하 : 저의 이름은 제가 할아버지 회갑년에 태어나서 돌림자 하(河)자에 갑(甲)자를 얻었다고 해요. 자가 관명이라면 호는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일종의 별명이죠. 저도 호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가장 먼저 받은 호는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께서 “이 땅의 중심인 문경새재를 중심축으로 인생과 문학의 광대한 원을 그리도록 하라”는 뜻을 담아 지어주신 ‘문곡(聞谷)’이었어요. 그런데 뜻이 너무 크고 부담스러워 아직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몇 년 전 ‘고향예찬’ 시를 면 경계석과 함께 세운다면서 호를 물어왔어요. 한참을 주저하다가 ‘포월(圃月)’을 줬지요. 하늘재 고갯마루에 채마전이 붙어 있는 서재 ‘산다시월헌(山茶十月軒)’을 짓고 얻은 호인데, 집 뒷산인 백두대간 포암산에서 ‘포’자를 얻고, 주산인 월악산에서 ‘월’자를 딴 것으로, “달빛 아래서 채마밭을 일구는 시인” 정도의 의미를 갖죠. 그런데 그것도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최근 들어 시인들에게 서예로 시를 써 선물하레 되면서 새롭게 사용하고 있는 호가 ‘예당(醴堂)’입니다. ‘단물 예(醴)’자인데, 『예기(禮記)』에 나오는 「천강감로지출예천(天降甘露地出醴泉 : 하늘에서는 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단물이 솟아난다)」에서 따온 것으로 관향인 예천(醴泉)을 그리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담긴 호라 하겠습니다.

송옥임 : 이제 글 쓰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스토리문학》2009년 11월호에 “시상을 품고 굴리고 굴린다”란 제목의 ‘나의 비밀스런 시창작노트’를 발표하신 적 있는데, 그때 하신 말씀입니다만 좋은 시는 어떻게 창작해야 하는지요?

권갑하 : “나는 시를 어떻게 창작하는가?” 시인이라면 누구나 던져보게 되는 자문이죠. 시라는 것이 잠자는 사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고통스럽고 지극히 비밀스런 창작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겠죠. 저는 좋은 시는 좋은 시상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좋은 종자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죠. 하늘재에 작은 주말농장을 일구면서 깨달은 것이 있어요. 과일나무를 심었는데, 4년 차에 이르고 보니 다 캐내야할 상황이에요. 품종이 좋지 않은 탓입니다. 묘목이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열리는 과일을 보고서야 좋은 품종이 아님을 알게 된거죠. 시도 다를 바 없어요. 시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시상에서 이미 좋은 시와 나쁜 시가 판가름이 납니다. 좋은 시상은 형상화도 쉽지만 시상이 좋지 않으면 밤을 새워 애를 써도 좋은 시를 얻기가 어려워요. 좋지 않은 씨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좋은 시상만 낚으면 시의 절반은 얻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김순진 : 그렇다면 좋은 시상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권갑하 : 좋은 시상을 얻기 위해 나는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실제 어떤 결과에 이르고 있는지를 성찰해봐야 합니다. 무릇 시인이라면 주변의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자세가 요구되죠. 뒤집어도 보고 앉아서도 보고 요리조리 세밀하게 대상을 뜯어 봐야 합니다. 형상은 무엇을 닮았고 어떤 이미지를 풍기는지 내면의 속성까지 꿰뚫어 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대상이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올 때가 있어요. 뭔가 머리를 땅! 치고 지나갈 때가 있는 거죠. 책상에 놓여 있는 전화기나 안경에서, 아침저녁 마주치는 아내의 얼굴에서, 아무런 저항도 않고 서 있는 옷걸이에서, 그 옷걸이가 넘어지는 상황 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마음에 칼금을 그으며 스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낯섦과 설렘, 놀람과 짜릿함, 전율과 슬픔, 여운과 그늘 등이 칼금을 그으며 지나갈 때, 바로 그 순간! 나른하던 눈이 번쩍 뜨이고, 생각은 한순간 광야로 달려 나가고 아픈 상처를 다시 헤집기도 하죠. 천길 물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그 어떤 오싹함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기도 하죠. 바로 그 순간이 우주를 떠돌던 주인 없는 ‘시상’이 마침내 나와 인연을 맺으러 다가서는 순간입니다. 시상이 서늘하게 시인의 가슴에 깃드는 화엄의 순간인 거죠. 우리가 흔히 명시라 부르는 작품들은 대개 이러한 운명적인 만남 속에서 시상이 잉태되고 고통스런 창작의 과정을 거쳐 멋진 시의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전하라 : 시인이 그런 순간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권갑하 :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은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 왔다 하여 모두가 좋은 시를 빚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어떤 사람은 너무 기분이 좋아 술잔만 기울이다 그만 흘러 보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슬픔에 젖어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이라면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되겠죠. 감동적인 접신의 순간을 놓치는 시인은 시인 자격이 없습니다. 이때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시상을 낚아챌 수 있는 고도의 감각입니다. 두꺼비가 혀로 파리를 빨아들이고, 물고기를 한순간에 낚아 올리는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감각을 얼마나 예민하게 살려나가느냐에 따라 두꺼비는 목숨을 유지할 수 있고, 시인은 독보적인 시세계를 열어갈 수가 있습니다. 골프를 배울 때 코치가 주문하죠. “몸의 신경세포가 스윙 궤도를 잊지 않도록 늘 스윙 장면을 연상하면서 연습을 해야 한다”고. 스포츠가 그러한데 사유의 예술인 시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송옥임 :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상을 낚아챌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일까요?

권갑하 : 참 좋은 질문입니다. 좋은 시상이 없는 상태에서 밤을 새워 끙끙거려봐야 좋은 시를 얻을 수 없죠. 그렇다면 그 어떤 것이 칼금을 그으며 지나갈 때 어떻게 낚아챌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할 텐데요. 이럴 때 수단 중 하나가 ‘메모’입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는 참으로 믿을 게 못되죠. 금방 화장실에서 떠오른 기막힌 생각도, 운전 중 빠져든 상상의 세계도 불과 몇 분 뒤에 다시 생각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머리입니다. 그러니 좋은 시상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메모를 해야 합니다. 알아보지도 못할 메모를 어둠 속에서 남겨본 경험이 없는 시인은 배부른 시인이죠. 꿈속에서도 메모를 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은 결코 허풍은 아닙니다.

천영필 : 그렇군요. 메모를 해야 한다는 말, 꼭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권갑하 : 시인은 가슴에 늘 뭔가를 품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굴리는 어떤 생각, 사유가 있어야 하는 거죠. 번개처럼 가슴을 치고 지나가던 시상이 그물에 걸려들면 앞뒤로 굴려보며 어떻게 요리해 먹을 것인가를 구상하는 시간이죠. 어떤 시인은 이를 시상과 연애하는 시간이라고도 하죠. 고스톱을 잘 치는 사람은 혼자서도 패를 돌리고, 바둑에 빠지면 잠잘 때도 천장에 포석을 놓는다고 하죠. 창작은 이보다 몇 배의 몰입이 요구됩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시상을 굴려야 합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매달리지도 않으면서 “시가 잘 안 써 진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이 있죠. 시가 웃을 일이며, 시를 우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래 갖고 놀며, 굴리고 굴려야 시가 마침내 오롯한 집을 짓게 되는 거죠. 동고동락! 시인에게는 바로 이런 시적인 삶이 요구됩니다. 시상이 선명하게 집을 짓게 되면 얼개를 짜는 일은 다소 기능적인 문제죠. 이 또한 쉽지는 않지만 좋은 시상을 포착하는 문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시의 집을 짓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시상도 없이 시의 집을 지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김순진 :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요?

권갑하 : 선명하게 포착된 시상으로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써 내려간 작품을 저는 좋아합니다. 시상이 선명한 시라야 독자도 감성을 자극받고 작품 속에 혼이 살아 숨 쉴 수 있으니까요. 여기저기 짜깁기 된 시, 혼란스럽게 뒤틀려진 시, 겉만 번드레하고 혼이 서려 있지 않은 시에 후한 점수를 주긴 어렵죠.

전하라 :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초고는 빨리 잡고 퇴고는 오래 해야 합니다. 굴린 시상의 얼개가 어느 정도 짜지면 이제 본격적인 퇴고의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시상을 포착해 얼개를 짜는 초고의 과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시간을 끌 경우 처음 얻은 시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반면 퇴고는 음식을 숙성시키듯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정도 퇴고를 거친 작품도 한참 밀쳐놨다가 다시 읽어보면 고칠 부분이 많이 나타나죠. 보이지 않던 허점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숙성기간이 길수록 시의 향기도 깊어집니다.

송옥임 : 현대시조가 독자들 가슴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권갑하 : 시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명칭에 ‘때 시(時)’자가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는 그 시대의 노래란 뜻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해야지 과거에 갇히면 도태되고 맙니다. 저는 현대 시조의 첫 번째 과제로 ‘감동’을 꼽습니다. 오늘의 시조에 독자들이 감동을 받느냐, 시조의 매력과 묘미를 살리고 있느냐 하는 점은 어쩌면 시조의 존립 그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천영필 : 감동적인 시조라, 맞는 말씀입니다. 어느 예술작품도 감동이 없으면 독자의 가슴속에 오래 살아남을 수 없지요. 시조를 배우려는 후배들과 시조를 배우지 않는 시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권갑하 : 스토리문학이 시조에 지면을 많이 할애해줘서 고맙습니다. 지성찬 시인이 오랫동안 주간이셨는데, 저는 김순진 발행인이 참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현대시와 시조의 적절한 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시조는 우리 시형인 만큼 배우기도 쉽고 그러기에 누구나 써야 합니다. 적어도 이 땅의 문인이라면 우리 민족의 숨결로 빚어진 시형인 시조는 창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조 창작을 배우면 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자유시를 쓰는 사람에겐 더욱 압축된 좋은 시를, 산문을 쓰는 작가에겐 절제미와 격조가 높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전하라 편집장님도 시조 써 보시죠? 시에 입문하는 분들에게 저는 기왕이면 시조를 먼저 창작하라고 권합니다. 사실 깊이 들어가면 시든, 시조든 차이가 없죠. 여기에 시조는 또 우리 민족시라는 자부심도 있으니 더욱 좋습니까.

김순진 :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에 대하여 말씀해주세요.

권갑하 :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을 거쳐 이번에 부이사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는 만큼 한국문인협회가 문인들의 기대에 적극 부응하는 문학 단체가 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특히 젊은 문인들의 문협에 많이 참여하도록 하는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이 필요합니다. 최근 치러진 한국예총 이사장 선거에서 1963년생의 젊은 분이 회장에 당선되어 문화예술 분야에 앞으로 큰 변화가 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문협을 비롯해 미술협회, 국악협회, 연예인협회 등 10개 단체가 예총 소속인데, 우리문협도 이러한 시대 흐름에 뒤쳐지지 않는 조직이 되도록 변화와 개혁을 해야 합니다.

시조문학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추진해오고 있는 시조 대중화운동을 지속해나갈 생각입니다. 2004년부터 운영해오던 <현대시조 아카데미>도 직장 일 때문에 온라인으로만 운영하고 있는데, 좀 더 열정을 쏟을 계획입니다. 최근에 제가 유튜브에 <권갑하TV>를 오픈했숩니다. 또 하나의 도전이죠. 앞으로 문인들의 작품과 삶을 조명하는 문학콘텐츠를 제작해 담을 계획입니다. 스토리문학 독자 및 작가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구독>과 <좋아요> 클릭도 부탁드립니다.

전하라 : <스토리문학>에 거는 기대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권갑하 : 저는 <스토리문학>이 지난 2004년 창간될 때부터 애정을 갖고 있는데, 아무튼 문예지 발간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애를 쓰고 계심에 경의를 표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갈수록 종이매체의 사양화는 더욱 깊어질 것인 만큼 시대 변화에 부응하고 독자가 원하는 모색이 필요할 것입니다. 문학의 텃밭을 일군다는 사명감과 의지를 갖고 한국문학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힘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순진 : 오늘 바쁘고 일기가 좋지 않은데도 저희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특별히 문경 출신 시인들과 함께 오찬을 같이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앞으로 부이사장님이 하시는 일에 응원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권갑하 : 고맙습니다. 올해 문경새재여름시인학교에 김순진 교수님을 초대합니다. 오셔서 창작특강도 해주시고 스토리문학 독자들과 함께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정식으로 초대합니다.

김순진 : 알겠습니다. 시간을 내서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서 권갑하 시인과의 메인스토리 취재는 끝이 났다. 다음은 권갑하 시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설과 함께 대표시 3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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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갑하 시세계]

 

권갑하 시인의 시조가 시조 시단에 크게 기여한 면이 있다면 바로 시조의 탈고답화일 것이다. 시조 시집들 가운데 권갑하 시인의 것들이 독자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끄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 장경렬(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권 시인은 사물의 구체성과 그에 대한 개성적 해석을 적절하고도 참신한 유추 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장인匠人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관과 내면을 두루 탐사하는 현실 감각을 일관되게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비유 형식으로 구성해 드러내주는 얼마 안 되는 실례에 속한다.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권갑하 시인은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의 체험을 바탕으로 섬세한 비유를 통해 탁월한 서정성으로 격조 높은 시조의 완결성을 보여주었다. 소시민의 아픔으로 체화되는 도시서정의 모더니즘에서부터 다문화와 음식과 발해의 거대한 역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들을 변주해내는 그의 능력은 넓이와 함께 깊이를 지니고 있다. 디아스포라를 넘어서 역사의 변경까지를 확대하는 시인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증언은 후학들에게 현대시조가 나아가야할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 이지엽(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자아의 해체에 기반을 둔 사랑의 실천은 타자와의 결합과 새로운 세계의 창출을 가능케 했으며, 타자를 향한 시인의 사랑은 벌거벗은 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라는 사랑의 실천으로 귀결되었다. 특히 인사동에서 발견한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성에 대한 발견은 더욱 깊고 그윽한 삶의 정취에 눈뜨게 했다. 그리고 실존적 조건으로 놓여 있는 삶의 고통에 대한 성찰과 구도의 시의식은 생명의 진실을 향해 나아갔고, 「누이감자」와 같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황치복(문학평론가)

 

권갑하는 난만한 시대의 상처 속에 ‘숫돌’을 간다. 거기다 정신의 날끝을 벼리고, 기진한 눈빛을 닦기도 한다. (중략) 권갑하는 자기 앞에 무성한 실존의 고뇌를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과 타자의 경험을 결속하기 위해 “다 닳은 지문 위를 종종걸음 치며 가는” 숱한 존재의 “발자국들”을 주시한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창에 붉고도 따뜻한 「빗물문장」의 “흘림체가 번져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 박기섭(시인)

 

권갑하 시인은 결혼이주여성에 주목한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현실을 시조 속으로 과감하게 끌어들이려는 최초의 시도다. 결혼이민자를 화자로 내세운 다음, 전통서정의 화법으로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시들에 유독 눈이 오래 머무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

 

권 시인의 맛시조는 ①대상 레시피들에 대한 살아있는 감각, 그리고 ②식탁에 동참한 사람들의 소통과 즐거움, ③읽기에서의 속도감 있는 시어의 개발과 그 발현, ④음식 세태의 다양한 풍자와 유머 구사, ⑤섭취에 대한 생태적인 환류에까지, 맛시조가 지닌 자질들을 두루 갖춘 전범典範의 작품들이다. ⑥마지막 수首나 장章에서 주제 흐름에 틀을 바꾸어 환기하는 점도 재미와 감동을 끌어내는 도드라진 부분이다.

- 노창수(시인, 문학평론가)

 

권갑하 시인이 ‘현대’와 ‘도시’라는 시공간에 시조 창작의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며 시조를 현대 문학의 장르에 굳건히 서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권갑하 시인을 현대시조의 진정한 ‘글꾼’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문무학(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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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갑하 대표작]

 

외등의 시간 외 2편

 

권갑하

 

울렁이는 욕망들이 굽은 등마다 흘러나오는

지워진 먼 길 끝에선 아우성도 몰려온다

허물을 덮어주려면 몰래 별도 띄워야겠지.

 

은밀한 갈증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해진 상처 감추려 지친 바람 분주하지만

실직의 허기진 강은 눈물에도 젖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굴린 공은 어디로 굴러갔나

홀로 깬 기다림은 파도소리로 훌쩍이는데

쓸쓸한 작별의 행방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

 

제 가슴 속 불을 밝혀 외따로 돌아가는

어둠을 건너는 외등의 경건한 고독이여

아득한 혼잣말처럼 문득 빗방울이 환하다.

 

(2007년 제17회 한국시조작품상 수상작)

 

 

세한의 저녁

 

 

공원 벤치에 앉아 늦은 저녁을 끓이다

더 내릴 데 없다는 듯 찻잔 위로 내리는 눈

맨발의 비둘기 한 마리 쓰레기통을 파고든다.

 

돌아갈 곳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눈꽃 피었다 지는 부치지 않은 편지 위로

등 굽은 소나무 말없이 젖은 손을 뻗고 있다.

 

간절히 기댈 어깨 한 번 되어주지 못한

빈 역사(驛舍) 서성이는 파리한 눈송이들

추스른 가슴 한쪽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1998년 제17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작)

누이 감자

 

잘린 한쪽 젖가슴에 독한 재를 바르고

 눈매가 곱던 누이는 흙을 덮고 누웠다

 

비릿한 눈물의 향기

양수처럼 풀어 놓고

 

잘린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새순처럼

쪼그라든 시간에도 형형한 눈빛은 살아

 

끈적한 생의 에움길

꽃을 피워 올렸다

 

허기진 사연들은 차마 말로 못하는데

서늘한 눈매를 닮은 오랜 내력의 깊이

 

철없이 어린 꿈들은

촉을 자꾸 내밀었다

 

(2011년 제30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작)

 

권갑하(權甲河) 시조시인 연보

 

 

․ 1958년 경북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탑동에서 부 권석문(權錫汶, 본관 예천, 초명 석조錫祚) 씨와 모 반우중 씨 사이 3남3녀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남.

․ 1980년 농협초급대학 졸업 후 농협 입사. 7월 군 입대, 카투사(KATUSA)로 미2사단 S&T대대 복무.

․ 1983년 농협 복직, 시·수필·칼럼 쓰다 <매일신문> 신춘문예 출신 지역문인 정석주 나래시조 회장 만나면서 시조에 전념키로 결심. 리강룡·문무학 등 문인들과 교유.

․ 1985년 <나래문학회> 동인 참여, 고문이신 정완영 · 박재삼 선생님 만남. 월간 《새농민》 7월호에 시조 처녀작 「들길에서」 발표. 계간 《현대시조》 겨울호 제3회 지상백일장에 은상(「책」) 당선. 10월 권차숙(본관 안동)과 결혼.

․ 1986년 계간 동인지 《나래시조》에 매호 4~5편 시조 발표. 아들 세영 태어남. 농민문학상 농촌운동부문 당선돼 대구 <매일신문>(10.11) ‘이번 주에 만난 사람’ 전면 소개.

․ 1990년 농협중앙회 서울 본부로 이동. 문학 모임에서 등단 권유 받고 즉시 응모 《시조문학》 초회 추천 받음. 아들 문영 태어남.

․ 1991년 《시조문학》 2회 추천 완료 및 《문학세계》 신인상 당선.

․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처용의 탈」. 심사 장순하), <경향신문> 신춘문예(당선작 「춤추는 처용」. 심사 김상옥·이상범) 당선.

․ 1993년 제5회 <나래시조문학상>(수상작 「바다이미지·4」) 수상. 농민신문사로 근무처 옮겨 1994년 『농민신문 30년사』책임 집필.

․ 1995년 윤금초·유재영 선생님 권유 ‘오늘의시조학회’ 가입.

․ 1997년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학위 취득. 90년대 시조동인 ‘역류’ 결성 주도, 초대·2대 회장 맡음.

․ 1998년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받음(심사 오세영·김명인·정희성). 제17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수상작 「세한의 저녁」). 「달-서울역에서」 ‘1998년 대표하는 문제시·시조’ 선정(한국비평문학회).

․ 1999년 최초의 농협역사비평서 『농협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목이 메인다』(좋은날) 출간. 첫 시집 『단 하루의 사랑을 위해 천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좋은날) 출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름. 계간 《나래시조》 편집주간 맡음.(~2014)

․ 2000년 답사여행서 『왕건과 떠나는 문경새재 답사여행』(세시) 펴냄. 농민신문사 월간 《디지털농업》창간, 편집장 맡음.

․ 2001년 시조집 『세한의 저녁』(태학사,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76) 출간, 문예진흥원 ‘올해의 좋은 시집’ 선정.

․ 2002년 시조해설집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알토란) 펴냄. 문경 관음리 하늘재에 집필문화공간 ‘산다시월헌(山茶詩月軒)’ 건립.

․ 2003년《나래시조》 혁신호 발간. 김천 직지사에서 시조장르 최초로 일반인 대상 ‘여름시인학교’ 개설. “시조를 현대가요로” 시노래패 <울림>(박제광 가수) 등과 시노래운동 전개, 지금까지 80여곡 작곡 및 공연.

․ 2004년 새김아티스트 고암 정병례 선생께 전각예술 사사.(~2007) 인터넷문학클럼 <시로 여는 e좋은 세상> 개설, 클럽장 맡아 사이버시조운동 전개. <현대시조 아카데미> 개설시조 창작지도 시작.

․ 2005년 제7회 <올해의 시조문학작품상> 수상(수상작 「달-서울역에서」). 제1회 백수 정완영 전국시조백일장 개최 및 백수문학관 건립 추진. 나래시조시인협회 회장 취임.(~2014)

․ 2006년 『나래시조40년사』 발간, 기념연(서울 달섬) 개촤. 계간 《나래시조》에 현대시조 100년 특별기획으로 100명 시인 대상 <내가 좋아하는 옛시조><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조사 발표, 언론 주목 받음. 시조전문지 《화중련》<교과서 수록용 현대시조 100선>에 중학교용 시조로 「숫돌」,「종」 선정됨.

․ 2007년 제17회 <한국시조작품상> 수상(수상작 「외등의 시간」).

․ 2008년 농협대학교 겸임교수 출강.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사무국장 맡음. 여름시인학교 개최지문경으로 옮겨 개최. 《한국시조》 편집위원 참여, 김삼환 시인과 한국시조작품상 운영 지원.

․ 2008~2014년 중앙일보 주관 중앙시조백일장 심사위원 역임. 서울지하철 윈도우에 시조「담쟁이」「장관」「비 오는 날」 게시됨, 안국역 6번 출구 타일벽에 시조 「인사동」 새겨짐.

․ 2009년 제3시집 『외등의 시간』(동학사)과 사랑시선집 『사랑은 기다림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입니다』(책만드는집) 출간. 제6회 <한국문협작가상> 수상(수상시집 『외등의 시간』). 월간 《레이디경향》 12월호에 “시조의 명맥 현대시로 잇는 시인” 4면 소개. ‘문경문학인대회’ 처음 주관, 개최. 문경테마시집 『그대 맨발로 오라』(알토란북스) 엮음.

․ 2010년 한양대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과정 입학. 문경새재여름시인학교장 취임.

․ 2011년 다문화 테마시조집 『아름다운 공존』(알토란북스), 첫 시조평론집 『현대시조 진단과 모색』(알토란북스) 출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창작지원금 수혜. 초등학교 5-1학기 국어 <읽기> 국정교과서에 동시조 <비 오는 날> 수록됨(~2014). 몽골 국립예술대학 초빙교수 <한국시조의 현대적 변용> 주제 강의. 제30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수상작 「누이감자」).

․ 2012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당선.

․ 2013년 시조암송경연대회용 시집 『도전! 시조암송 100편』(알토란북스, 개정판 2015) 발간하고 제1회 전국시조암송경연대회 개최. 공무원문예대전 심사위원 활동. <한국문학예술인협동조합> 창립 주도.

․ 2014년 시조논문 「시조의 시대성 수용 양상과 형식미학」(『한국시조시학』 제2호), 「디지털시대 현대시조의 과제와 대응 전략 연구」(『문화예술콘텐츠』 7호) 발표. 계간 《나래시조》 발행인 맡음. 『농민신문50년사』 편찬위원장을 맡음.

․ 2015년 한양대 대학원, 문화콘텐츠학 박사학위 취득(논문 「아리랑의 글로컬문화콘텐츠화 전략 연구」). 한양대 대학원 겸임교수 출강. 시조선집 『누이감자』(알토란북스) 펴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연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 당선(~2018). 농민신문사 출판국장·고객지원국장·논설실장 등 역임 후 12월 31일 명예 퇴직함.

․ 2016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받음. 국민연수기관인 농협중앙회 도농협동연수원장 취임. 『나래시조50년사』발간, 기념연 개최(문학의집‧서울).

․ 2017년 발해 역사 테마 제5시조집 『겨울 발해』(알토란북스) 출간. 제9회 <바움문학상> 수상. 발해시집 출간 및 개인시노래음반 『그대 그리운 날은』 출시 기념공연.(함춘회관) 문경새재여름시인학교 <전국시조낭송대회> 도입, 개최.

․ 2018년 두 번째 시조평론집 『현대시조와 모더니즘』, 첫 산문집 『하얀 인연-하늘재에서 띄우는 편지』(알토란북스) 펴냄.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 개관(하늘재, 산다시월).

․ 2019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취임(제27대 임원선거에 이광복 이사장과 동반 출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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